북유럽 신화에서 독특한 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줄줄이 나오는 가운데,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지요. 그것도 모든 것의 종말, 라그나로크.
라그나로크로 기존의 북유럽 신들은 모두 싸우다가 죽는 등 사라지게 될 거라는 이야기.
그 뒤에는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식의 희망찬 후일담이 있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저 결말을 의식하면, 북유럽 신화의 갖가지 다양한 일화를 감상할 때 아무래도 맥빠지는 느낌이 들게 되고는 합니다.
어차피 모두 다 종말을 맞을 텐데...같은 기분.
그리고 처음 작가 본인은 의도할 리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된 전설 테마가 있습니다.
중세 기사 문학 중 이른바 샤를마뉴와 기사 전설.
돈 키호테가 특히 좋아한 기사소설로도 알려진 <광란의 오를란도>가 바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샤를마뉴 전설 문학에서 최초로 주목받은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롤랑의 노래>입니다.
<롤랑의 노래>에서 롤랑을 비롯한 샤를마뉴의 용감한 기사들은 모두 전멸하고 맙니다.
그 직후 샤를마뉴가 설욕전을 벌이고, 원수를 갚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미 기사들이 다 죽었다는 건 달라지지 않지요.
12세기 초 롤랑의 노래가 쓰여질 때, 작가는 아마 짐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수백 년 동안 <롤랑의 노래>를 비롯해서 샤를마뉴와 기사라는 테마가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끌게 될 거라는 점도.
그리고 <롤랑의 노래>에서 죽은 롤랑과 기사들이 기사문학의 주역으로서 활약하는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라는 점도.
그리고 <롤랑의 노래>가 있기에, 갖가지 다채로운 기사 모험담의 결말은 주역 캐릭터들이 배신으로 죽는다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상당수의 작품은 아예 롤랑의 노래 시점까지 가기 전에 끝나버리지만, 롤랑을 비롯한 주역 캐릭터들이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식의 말만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샤를마뉴 전설 테마 작품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에피소드 등 일부분만을 다루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대성한 것으로 유명한 불핀치가 정리한 버전처럼 여러 이야기를 묶어서 정리하면, 결국 저 스토리라인밖에 나올 수 없지요.
다양한 모험담, 그리고 배신자의 농간으로 전멸당하는 기사들.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그렇게 파생작품이 많이 나오고 인기를 끌게 될 거라고 작가가 상상하지도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로크 같은 스토리라인이 되어버렸다는 건 묘한 느낌이 됩니다.
다음 블로그는 9월 30일까지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티스토리로 옮겨 가게 될 듯한데, 아직 최종결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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