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고전 명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원작으로 더 유명합니다.
어쩌면 원작자인 쇼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보다, 그 영화의 원작자라는 게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쇼는 1950년에 죽었기에 1964년 제작된 그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쇼가 살아 있는 동안 1938년 영화로 만들어진 적도 있지요. 그리고 쇼는 그 영화에서 대본 각색 쪽을 맡았고, 그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노벨상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 버전과 쇼의 원작은 내용과 표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초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건 쇼의 원작 희곡에서 영화 버전과 달리, 여주인공 일라이자가 귀부인 마님이 되지 않는 결말이 된 이유와도 이어집니다.
쇼는 희곡 <피그말리온>을 일종의 사회 풍자처럼 여기고 썼습니다.
쇼의 작품에서 일라이자는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에서, 상류계층 신사의 후원으로 사교계 아가씨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합니다.
그 상류계층 신사가 일라이자를 후원하고 교육시킨 이유는, 순전히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희곡 속에서 일라이자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과 자립성 등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을 사교계 아가씨처럼 탈바꿈시킨 '후원자'가 자신을 과시적인 작품처럼 여기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면서요.
그런 면에서 희곡 속 일라이자는 교육을 받으면서 주체성을 자각한 아가씨이자, 자신을 교육시킨 사람에게서 벗어나는 독립 서사의 주인공입니다.
쇼는 일라이자가 사교계의 화려한 주인공으로 부각되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희곡을 상연할 때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여러 부분은 삭제해도 된다고 따로 지정했을 때, 일라이자가 사교계의 여주인공처럼 묘사되는 대사관 무도회 장면을 빼도 된다고 지정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쇼의 희곡이 처음 선보였을 때부터, 물질적으로 보잘것없던 여주인공이 갑자기 공주님같은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반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쇼가 먼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묻히다시피했지요.
심지어 1938년 쇼의 생전에 영화로 만들어질 때, 쇼는 자신이 대본 각색 쪽을 맡았지만 결말만은 보다 상업적인 방향으로 변경해야 했습니다. 즉, 일라이자가 사교계의 상류층 신사와 이어져서 정식으로 귀부인 마님이 되는 결말이지요.
그리고 이 결말이 뮤지컬 및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계층에 따라 결혼 상대가 사실상 정해지던 시대이니, 저 정도의 결말로도 어쩌면 신분제에 도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작과 비교해보면 원작의 메시지와 의도를 없애버린다는 생각은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여기서 드는 생각. 그렇다면 쇼의 원작의 결말을 바꾸는 건 예술적 가치가 깎이는 일이었을까요?
원전이 따로 있는데 원전과 결말이 다른 각색물과 창작물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미묘한 물음이 됩니다.
따지자면 희곡 피그말리온의 원전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작품 같은 아가씨와 해피엔딩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마이 페어 레이디 영화의 결말은 오히려 원전에서 변형된 결말을 되돌린 것이라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그런 면을 강조하면, 조지 버나드 쇼의 의도가 완전히 묻히고 왜곡 수준으로 변형된 것을 또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과연 우열 관계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요.
사회적으로 뚜렷한 메시지를 의도하고 창작된 작품도, 그저 겉모습으로 여자가 화려하게 출세하는 신데렐라같은 이야기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작품을 만들면,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인기를 끌고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좋은 사례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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