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화재가 일어나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성화 한 점이 파괴됩니다. 이 때 망실된 작품은 티치아노의 <최후의 만찬>으로, 오늘날에는 판화 등으로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림의 형상을 알 수 없습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인기 있던 화가인 파올로 베로네세에게 새로운 <최후의 만찬>을 의뢰합니다. 1573년 베로네세는 새로운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지만,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베로네세의 <최후의 만찬>의 인수를 거부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만, 대개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주문자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쳐 그리게 하는 것으로 진행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베로네세의 1573년작 <최후의 만찬>은 더욱 엄청난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 작품이 무려 신성모독 혐의로, 사제들의 조사를 받으라는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사실상 종교 재판을 받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치였습니다.
문제가 된 <최후의 만찬>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그림 잘못 올린 게 아닙니다. 베로네세가 최후의 만찬 장면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고 완성한 그림 맞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이 그림을 봤을 때, 제목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듯합니다.
<최후의 만찬>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할, 레오나르도 다 빈친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이렇게 엄숙한 분위기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고,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도 이런 분위기의 그림을 원했을 것입니다.
베로네세의 <최후의 만찬>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 잔뜩 나온다는 것과,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작품에서 어릿광대, 술꾼, 독일 병사가 등장한다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고, 특히 독일 병사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독일 지역의 개신교를 의도적으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 동석시켜 종교개혁을 긍정하는 것 아니냐는 식의 해석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던 독일 지역은 종교개혁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으며, 카톨릭과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개신교 세력이 국제적으로 맞부딪힌 1618~1648년 동안의 30년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독일 지역의 군인이 등장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예민한 문제로 여겨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특히 문제가 된 디테일 부분을 편집한 이미지입니다. 왼쪽부터 각각 난쟁이 어릿광대, 거나하게 취한 술꾼, 독일 지역 군복을 입은 병사입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하나같이 동떨어진 등장인물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배신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났다는 일화 자체와도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고요.
등장인물들이 기원전 1세기경 로마나 중동 지역의 의상이 아니라, 16세기 이탈리아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http://blog.daum.net/ariesia/115 근대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등장인물에게 당대 의상을 입히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사 그 시대에 의상 고증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해도, 이 작품에서 의상 고증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점으로 보이는 디테일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요.
종교재판 과정에서 베로네세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와 예수 그리스도 및 제자들에 대해 모독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어릿광대나 술꾼 등은 어디까지나 예술가로서의 상상에 따른 묘사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해명이 일단 받아들여져, 베로네세는 <최후의 만찬>에서 특정 디테일을 수정할 것을 요구받는 조건으로, 무죄방면됩니다. 즉 어릿광대나 독일 병사 등은 덧칠해서 화면에서 없애고, 대신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넣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로네세의 <최후의 만찬>은 <레위 집안의 만찬>으로 "교체"됩니다.
"교체"된 <레위 집안의 만찬>은 이 글의 첫번째 이미지로 올린 그 작품입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제목을 <레위 집안의 만찬>으로 바꾸어서, 어릿광대와 술꾼 등 성경과 관련없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해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교 지침에 위배되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베로네세는 제목만 바꾸었고, 그림에는 약간의 수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종교재판까지 열렸던 이 일은, 그림의 제목을 바꾸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도대체 베로네세는 왜 최후의 만찬이라는, 성경의 주제에 성경 일화 중에서도 엄숙하기로 손꼽히는 일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디테일을 잔뜩 집어넣었는지, 이 작품만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당시에는 화가의 정교한 그림솜씨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불필요하지만 정교한 디테일 세부묘사를 잔뜩 집어넣는 경우가 많기는 했습니다. 이런 풍조는 종종 과도한 배경 및 소품 디테일에 그림의 주제가 오히려 묻혀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요. 여담으로 오늘날에는 이런 식으로 그림에 당대 사치품 등을 정교하게 그려넣은 부분이, 당시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실물 문화재가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그림에 묘사되었다면 그 시대에 이런저런 물품이 존재하거나 전래되었다는 당대 자료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로네세보다 앞서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화가 카를로 크리벨리의 1486년 작품인 <수태고지>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 앞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나타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는 그 장면인데, 이야기에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과도한 디테일이 너무 많아서, 시선이 분산되느라 마리아와 가브리엘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배경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렇다쳐도, 정교한 건물 장식, 양탄자 등의 복잡하게 생긴 소품, 화려한 깃털의 공작새를 비롯한 많은 새가 등장하며, 결정적으로 마리아와 가브리엘 못지않게 또렷하고 선명한 필치로 묘사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시선을 분산시켜버립니다. 정교한 세부묘사의 기교는 정말 대단하지만, 주제의식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어정쩡한 작품이 되어버렸지요. 오늘날 이 작품은 15세기 이탈리아에 정교한 무늬의 양탄자와 공작새와 여러 과일이 전래되었다는 주요한 자료로서 종종 언급되지만, 작품 자체의 평가는 미묘하며 미술사에서도 딱히 주목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화가의 기교 과시를 위해 일부러 불필요한 디테일을 추가했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어릿광대나 술꾼, 독일 병사 등을 그리는데에 딱히 초월적인 회화 기교가 동원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그림 솜씨를 과시하기 위해서 집어넣었다고 간주하기에도 애매하지요. 베로네세는 왜 최후의 만찬을 묘사하면서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왜 난데없이 화가 시대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그려넣은 걸까요?
이 의문은 베로네세의 다른 작품을 보면 간단히 풀립니다. 특히 베로네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보면, 그 이유를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을 정도지요.
베로네세의 1563년 작품,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에는 비극적인 뒷이야기가 있는데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지역을 점령할 때 이 작품을 약탈해 프랑스로 운반시킨 것입니다. 그냥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구입대금을 지불했다고는 하지만, 작품의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인 것은 둘째쳐도, 애초에 "판매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약탈당했다는 것 못지않게 비극적인 것은, 이 작품이 너무나 커서 당시 기술로는 운반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그림을 절반으로 잘라서 프랑스로 운반시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정교하게 복원해서 둘로 잘린 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혼인 잔치에 참석했는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일어난 곳이 가나 지역으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화면 정중앙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 작품이 성경 일화를 묘사했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 없이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등장인물들이 16세기 이탈리아식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것은 둘째치고, 떠들석한 군중과 악기연주장면 등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풍속이 풍부하게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베로네세는 원래 성경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풍속적 묘사를 풍부하게 집어넣는 화풍을 구사했고, <최후의 만찬>에서도 이때까지 그리던 식으로 그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가 유달리 엄숙하게 여겨지는 주제인데다, 카톨릭교에서 성경의 일화를 지나치게 파격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단속해야겠다는 지침이 내려진 시기와 공교롭게 맞물리는 바람에, 종교 재판소가 나설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림에 붓질 하나 더하지 않고도, 그림의 제목을 바꾼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인기 화가가 이때까지 그리던 방식으로 새 작품을 그렸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의 처벌을 받을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의 종교재판소는 성경 주제의 그림이라고 해도 떠들썩한 주제를 떠들썩하게 그리는 것은 용납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제목을 바꾼 것만으로도 무사히 넘어갈 수는 있게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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