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이던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한 점의 조각상이 세워집니다. 도나텔로가 성경에 나오는 유디트의 이야기를 주제로 조각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였습니다. 유디트는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홀로페르네스를 응징하기 위해, 홀로페르네스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척 하면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여걸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고 여성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남성에게 반항하는 것조차 대역죄처럼 취급되던 시절에도, 유디트만은 칭송받았으며, 여성이 남성을 죽인 것이 지탄받기는커녕 오히려 찬양받은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 성폭행당한 피해자였으면서도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자주 그린 주제로도 유명하지요. http://blog.daum.net/ariesia/64
도나텔로의 <유디트>는 유디트가 칼을 들고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려는 장면을 표현한 청동상으로, 유디트의 이야기에서 유디트를 피렌체에, 홀로페르네스를 피렌체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에 비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었습니다. 시뇨리아 광장 중심지, 실질적으로 피렌체 공공장소의 핵심장소나 다름없는 곳에 설치되었기에, 그 상징성은 더욱 강조되었고요.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진품은 현재 박물관에 있으며, 광장에는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은 그 복제품을 촬영한 사진으로, 도나텔로 진품을 촬영한 사진보다 작품의 구도와 세부표현 등을 더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사진이기에, 이 사진으로 올립니다.
하지만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시뇨리아 광장에 자리를 잡은 지 반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은 광장에서 철거되는 운명에 놓입니다. 작품 자체가 파기되지는 않았고 다른 장소에 전시되게 되었습니다만, <유디트>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조각상이 놓이게 됩니다.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를 광장에서 "치워버린" 이유는 불명확하며, 대략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합니다. 피렌체 여론이 이 작품을 광장이라는 공공장소에 설치하기에는 너무 폭력적인 구도의 작품이라고 여겼거나,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여자가 남자를 죽이는 장면을 불편하게 여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요. 다만 첫번째 견해라고 해도, 살벌한 분위기가 문제되었다면 몰라도, 목을 벤다는 주제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공산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라진 뒤 40여년이 지나서, 벤베누토 첼리니가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를 묘사한 조각상이 시뇨리아 광장에 새롭게 설치되었기 떄문입니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1545년 작품,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입니다. 목을 베려는 자세만 취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에서 한 술 더 떠 아예 목을 베어 들고 있는데도, 광장에 잘만 설치되었고 이후 수백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목을 벤다는 주제는 공통되는데도 불구하고, 도나텔로의 <유디트>는 거절당했고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는 허용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두 작품의 차이점 중 어떤 것이 문제시되었던 것일까요?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은 공공장소에 내세우면서, 성경의 일화를 묘사한 작품은 왜 철거된 것일까요? 그 시대에 성경은 되지만 신화는 안 된다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반대인 경우는 없었으니, 성경의 일화를 묘사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던 걸까요?
도나텔로의 <유디트>는 첼리니의 <페르세우스>와 달리 목을 베는 게 여자가 아닌 남자였기 때문일까요? 목을 베이는 게 사람이 아닌 괴물이어서였을까요? 아니면 도나텔로의 <유디트>는 대놓고 살벌한 분위기엔데 반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는 주제야 어쨌건 분위기 자체는 서정적인 느낌마저 줄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로 묘사해서였을까요? 유력한 추측은 여럿 있지만 아직까지 절대적인 정답은 확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첼리니의 <페르세우스>가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철거되었던 바로 그 공공장소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거절당한 이유에 대해 더한층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목을 벤다는 주제 자체가 문제시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예요. 40여년 동안에 갑자기 피렌체의 전반적인 정서가 급변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있던 자리에 새롭게 놓이니 조각상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입니다. 르네상스 조각예술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작품이자, 서양 미술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작품인 바로 그 <다비드>지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입니다.
묘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처음부터 도나텔로의 <유디트>를 대체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정 작품이 거절당해 그 자리를 대체한 작품의 경우, 처음부터 첫번째 작품의 거절 이유를 피드백해 그 요구 사항에 맞춰 제작된 경우가 많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일이지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원래 성당에서 성당 외부 조각품을 의뢰하여 만들어진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1504년 <다비드>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찬사에 찬사를 거듭했고, 이런 작품을 성당 장식으로만 놓아두기에는 아깝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장에 설치하게 되었고, 그 장소로는 도나텔로의 <유디트>가 있던 자리가 낙점되었다는 것이지요. 시뇨리아 광장이 넓은데다 이후로도 계속 그 광장에 새로운 조각상이 설치되었던 만큼, 조각상을 놓을 새로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을 터인데도, 굳이 피렌체를 상징하던 기존 조각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대신 놓은 것입니다. 원론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광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에 놓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도나텔로의 <유디트>에 대한 여론이 이미 미묘해져 있었기에 입지가 미묘해진 조각상을 공공장소에서 치울 겸 겸사겸사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정황상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가까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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