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문화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사라진 불>과 성 요한 축일

아리에시아 2015. 12. 19. 12:0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두 번째 오페라인 <Feuersnot>은 제목 번역부터가 제각각입니다. 이 제목의 단어를 직역하면 '불'과 '없다'라는  단어가 결합된 형태인데, 이 단어의 번역제가 정말 다양합니다. 제가 접한 번역제만 나열해도, '사라진 불', '꺼진 불', '불의 결핍', '화재 비상' 네 가지에 달합니다. 이 글에서는 일단 한글 자막이 달린 공연 dvd의 국내 번역명인 '사라진 불'을 택하겠습니다.

 

 

<사라진 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뮌헨의 시가지에서 어린아이들은 하지 축제의 풍습을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작을 모읍니다. 마을 사람들은 흔쾌히 장작을 내주는데, 얼마 전 이 마을에 이사 온 쿤라트라는 사람만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쿤라트는 마을 사람들과 일체 교류를 하지 않고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쿤라트가 살던 집이 마술사가 살던 집이었다면서, 쿤라트가 그 마술사의 후계자일 것라며, 어딘지 이상한 사람이라고 입방아를 찧습니다. 하지만 밖이 소란스럽자 문을 열고 나온 쿤라트는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멀끔하고 관대한 신사였고,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하지 축제가 다가온다는 것을 잊어버려서 아무 것도 못 한 것이라면서, 아이들에게 얼마든지 자기 집에서 장작을 가져가도 좋다고 합니다. 그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여주인공 디무트가 서 있었는데, 쿤라트는 디무트를 보자마자 사랑 고백을 하면서 키스합니다.

 

디무트는 쿤라트를 대놓고 거절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친구들에게는 쿤라트에게 나름대로 마음이 끌리기는 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사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디무트는 쿤라트가 자기에게 다짜고짜 키스한 것에 대해 불쾌한 기분이 앞섰고, 쿤라트를 골탕먹일 계획을 짭니다. 디무트는 쿤라트에게 밤에 자기 방 창문에서 바구니를 늘어뜨릴 테니, 그 바구니를 타고 자기 방으로 와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구니를 창문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끌어올리는 도중에 멈춘 뒤, 쿤라트가 탄 바구니가 집의 벽에 매달려 있는 상태로 만들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모습을 구경하게끔 만듭니다.

 

디무트가 작정하고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쿤라트는 자기가 사실은 마법사였다는 것을 밝히면서, 자신의 사랑을 조롱한 대가로 이 도시의 모든 불을 없애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로 마을에 있던 모든 불이 사라지고, 도시는 암흑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가씨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도시에서 다시는 불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차저차해서 디무트는 쿤라트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그 순간 도시 안에 불이 되돌아오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사라진 불>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관현악곡으로 개작하기도 했는데, 오페라에서 가수들이 부르는 버전보다 다음 동영상에서 연주되는 교향시 버전이 더 유명합니다.

 

 

토마스 비첨이 지휘해 로열 오케스트라가 1947년에 녹음한 <사라진 불> 관현악곡 개작 버전입니다. 오페라 맨 마지막에 쿤라트와 디무트가 연인으로서 2중창을 부르는 대목의 노래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음악입니다.

 

 

<사라진 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아이들이 집집마다 장작을 모으러 돌아다닌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한글 자막이 수록된 이 공연의 영상물은 현재 팔레르모의 마시모 극장 공연이 유일한데, 이 영상물의 한글 자막에서는 '하지 축제'를 위해 장작을 모은다고만 나옵니다. 그래서 왜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작을 모으는지, 장작을 모으는 것에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대사가 간간히 나오는데 무슨 뜻인지는, 오페라 공연 영상만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페라 <사라진 불>의 배경이 되는 하지 축제란, 기독교의 성 요한 축일과 연계되는 연례 행사입니다. 성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성인으로서, 낙타 가죽을 걸치고 사막에서 고행한 성인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식을 했던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성 요한은 6월 24일 태어났다고 전해지기에, 이 날은 기독교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짜는 바로 하지 즈음이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림 오른쪽에서 그림 정중앙의 예수에게 물을 붓는 의식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 즉 성 요한입니다. 이 그림은 베로키오의 작품으로서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 이 그림의 천사를 그렸다는 일화로 훨씬 더 유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그림에서 덜 중요한 부분은 화가의 제자들이 맡아 그리는 관례가 있었는데, 당시 베로키오의 제자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사 중 한 명을 맡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림 왼쪽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천사 중, 등을 보이고 있는 천사가 바로 스무 살 시절 레오나르도가 그린 부분입니다. 이 그림 중에서도 이 천사가 특히 많은 찬탄을 받았고, 바사리가 르네상스 시절 미술가의 행적과 일화를 기록한 <미술가 열전>에서는, 베로키오가 제자의 실력에 충격을 받아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는 일화도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이 일화는 오늘날에는 신빙성이 의심되며, 베로키오의 본업이 조각가이고 그림은 부업이었기에, 그냥 본업에만 전념했다는 학설이 대세입니다. 하지만 이 일화의 역사적 진실성과는 별개로, 이 일화는 그런 소문이 널리 퍼질 만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에는 성 요한 축일을 기리는 다양한 민속 문화 행사가 내려왔습니다. 그 중 독일 지역에서는 중세 이래 성 요한 축일 행사를 기리는 의미로 마을에서 대대적으로 장작불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 전통관습의 내용인즉, 마을 사람들이 장작을 모아 성 요한 축일인 6월 24일에 마을의 광장에서 장작불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이 불을 뛰어넘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이 불을 뛰어넘는 사람은 건강해지고, 연인이 같이 이 장작불 위를 뛰어넘으면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약초를 몸에 두르고 이 장작불을 뛰어넘은 뒤에 약초를 불에 태우면, 액막이가 된다는 풍습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사라진 불> 오페라에서 쿤라트는 디무트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서, 비단 여자에게 골탕먹고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뿐만 아니라, 하지 축제를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는 것에도 분노한다는 식으로, 하지 축제 직전이라는 시기를 유난히 의식하는 대사를 하는데, 이 대사는 성 요한 축일의 문화적 의미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디무트가 쿤라트를 골탕먹이는 방법은, 베르길리우스가 나오는 우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합니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와 함께 고대 유럽 3대 서사시로 손꼽히는 <아이네이스>의 작가로,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하는 고대 로마의 작가입니다.

 

베르길리우스가 등장하는 이 우화의 이야기는 오페라 내의 상황과 대동소이합니다. 베르길리우스가 한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그 아가씨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바구니를 타고 자기 집 창문으로 올라와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바구니를 끝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도중에 매달린 상태로 두었고, 베르길리우스는 졸지에 허공에 매달린 상태가 되고 맙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게 되었고, 베르길리우스는 단단히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전거는 없지만, 일종의 우화로서 널리 퍼졌습니다. 여자를 믿으면 이처럼 배신당할테니 여자를 믿지 말라는 식의 메시지를 퍼뜨릴 때 특히 자주 언급되었다고 하며, 이 이야기를 다룬 여러 미술작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루카스 반 레이덴의 판화 작품인 <바구니 속의 베르길리우스>입니다. 건물 양식이나 마을 사람들의 의상 등이 고대 로마 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림이 그려진 시대인 중세 말기-르네상스 초기 무렵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