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아카데미'라고 하면 기존 미술규칙을 중시하는, 고답적이고 딱딱한 화풍을 선호한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기존의 미술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가 평가의 척도이며, 미술규칙을 잘 지킨 그림일수록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나올 수 있어도 진정 혁신적인 작품은 나올 수 없다는 이미지가 있지요. 특히 근대서양미술은 이런 미술 아카데미식 작품 평가에 반발하면서 태동한 것이기나 마찬가지여서, 이런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습니다. 기술적으로 잘 그린 작품보다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 인상주의 때부터인데, 인상주의는 미술 아카데미식의 기준으로 그림을 평가하는 공모전이라 할 수 있는 살롱전에 대한 반발에서 태동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http://blog.daum.net/ariesia/118 아카데미는 미술작품을 역사화(서사화),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의 5단계로 나누면서 역사화가 초상화나 풍속화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할수록 잘 그린 그림이라고 평가하는 등, 기존 미술 규칙을 굉장히 중시했는데, 살롱전은 이런 성향이 극치에 달하는 행사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술 아카데미는 혁신보다는 기존 시스템을 고수하는 쪽을 선호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그랬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단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아카데미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는 법만 익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의 빈 미술 아카데미가 대표적인 사례로, 중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수 있었으며, 학생들이 새로운 미술적 시도를 하는 것도 웬만해서는 허용하는 편이었습니다. 빈 분리파의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에곤 실레(Econ Schiele, 1890~1918)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은 곳이 바로 이 빈 미술 아카데미였습니다.
에곤 실레는 드물게도 뚜렷한 대표작 없이, 자신의 독특한 화풍만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남긴 화가입니다. 에곤 실레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오히려 말문이 막히지만, 에곤 실레의 작품은 한 번 접한 사람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지요.
에곤 실레가 1911년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뒤틀리면서도 거친 분위기, 그러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독특한 화풍이 두드러집니다.
에곤 실레는 중고등학교 과정에 재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제대로 졸업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에곤 실레가 집중하는 수업이란 사실상 미술 과목밖에 없었고, 이 미술 수업이 에곤 실레가 받은 미술 교육의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에곤 실레는 17-18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미술 아카데미 같은 기관에 들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때에는 정규 미술 과정을 밟고, 엄정하고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만을 인정하던 시대였으니까요. 또한 에곤 실레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선호하는 웅장하고 장엄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근대 유럽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서사화,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의 5단계 중 서사화는 최대 5점, 정물화는 최대 1점을 주는 식으로 심사했기에, 서사화와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미술 아카데미의 외면을 받고도 남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에곤 실레가 응시했던 1906년의 빈 미술 아카데미는 중고등학교 과정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미술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적도 없으며, 웅장함이나 장엄함과는 거리가 먼 주제를 그리는 학생에게도 가능성이 보이면 문을 열어주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기준에서는 그림은 꽤 잘 그리지만 전체적으로 낙제생인데다 유급하고 제대로 졸업장도 받지 못했던 에곤 실레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허가를 받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곤 실레가 1905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해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미지 출처는 http://www.wikiart.org/en/egon-schiele/view-from-the-drawing-classroom-klosterneuburg 입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는 16살짜리가 그린 그림치고는 잘 그렸지만, 그림 자체만으로 압도적인 작품성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힘들지요. 하지만 빈 미술 아카데미는 가능성에 주목했고, 에곤 실레에게 입학을 허가합니다.
한편 에곤 실레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허가를 받았던 1906년, 화가가 되고 싶다며 무작정 빈으로 상경한 한 화가 지망생도 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에곤 실레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89년, 오스트리아의 린츠 지역에서 태어난 이 화가 지망생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맹렬하게 반대해서 시도도 못 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1903년 죽은 후에야 비로소 미술 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화가 지망생은 중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빈으로 상경했고, 에곤 실레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한 다음 해와 그 다음 해인 1907년과 1908년에 두 차례 빈 미술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릅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낙방했지요. 실의에 빠진 이 화가지망생은 무작정 방황하다가 훗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무작정 빈손으로 정치활동에 뛰어들었고, 조금씩 영향력을 넓혀가다가, 1933년 독일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미술학교 낙방생 중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할 인물,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THitler 1889~1945)입니다.
이 때 미술학교에서 히틀러를 입학시켰으면, 히틀러가 화가가 되었지 정치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글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미술 아카데미가 엄격하고 경직된 미술실력을 요구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겹치면서, 미술 아카데미가 문호를 넓혔다면 히틀러가 입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가정하는 글도 본 적 있고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빈 미술 아카데미는 미술 지망생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그림은 예술적인 의미의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빈 미술 아카데미는 히틀러의 작품을 보고 건축 도면 같은 느낌을 준다면서, 건축학 쪽이 더 알맞을 것이라고 권유하면서 히틀러를 낙방시켰는데, 히틀러의 그림을 보면 이런 평이 너무나도 잘 이해됩니다.
위의 그림은 아돌프 히틀러가 1911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기술적으로 못 그린 그림은 아닙니다. 하지만 건물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느낌을 줍니다. 이 작품만 그런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그린 그림은 거의 모두 이런 식이었습니다. 건물을 무게감있고 정교하지만 무미건조하게 그렸지요. 건물의 세부묘사는 잘 하는 편이고, 웅장한 느낌도 잘 살려내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그림의 주제로 건물을 택해 화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그냥 건물을 묘사했다는 쪽에 훨씬 가깝지요. 건물을 묘사한 명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에곤 실레가 변변한 미술 교육도 못 받은 상태에서 16살에 그린 그림과 비교해도, 이런 점이 두드러집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런 화풍의 그림을 좋아하는 개인 애호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히틀러의 그림이 환영받을 수 있는 수요시장은 딱 한 군데뿐입니다. 관광명승지의 기념엽서지요. 유명한 건물을 그린 기념엽서의 그림으로 쓰기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입니다. 실제로도 빈에 머무르던 시절, 히틀러가 그린 그림은 관광지 기념품으로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건물을 저렇게 무미건조하게 그린 그림을 선호할 만한 수요가 딱히 없고, 개성이나 독자적인 작품성 같은 것도 없어서 미술적으로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진이 나타난 뒤의 시점이니, 더더욱 그렇고요. 1906년 시점에서는 그림을 좀 그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잠재력이 보인다는 이유로 에곤 실레를 합격시켰고, 그 밖에도 비슷한 처지에서 별다른 미술 경력 없이 잠재력만으로 선발된 사례가 여럿 있었는데도, 아돌프 히틀러를 낙방시켰던 것은 그럴 만했기 때문인 겁니다. 다른 사례라면 몰라도, 히틀러를 낙방시킨 것 자체는 "경직된 미술 아카데미의 보수성"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히틀러를 입학시켰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지만, 히틀러의 그림은 미술학교에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미술학교가 히틀러를 입학시켰으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보다, "히틀러가 그림을 정말 잘 그려서 미술학교 입학 기준을 통과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가 오히려 더 그럴싸한 가정일 겁니다. 아니면 "히틀러 아버지가 히틀러의 미술학교 응시를 반대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거나요. 개인적으로는 히틀러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그림으로는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낙방하면 화가의 꿈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다면, 히틀러가 빈 미술 아카데미에 낙방한 뒤와는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고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조건으로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무탈히 응시했다 낙방한다면, 무작정 가출하다시피 상경했다가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미술학교에 응시하고, 그 상황에서 낙방했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방황하다 정치판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요. 다른 건 그렇다쳐도, 가출하다시피 무작정 상경하지만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히틀러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무작정 상경했을 때, 빈의 빈민가 등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빈에서는 많은 대도시가 으레 그렇듯이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 따로 있었고, 이 곳의 환경은 잠 잘 곳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하수구 쪽을 집으로 삼는 등,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유대인이 사람들을 착취하기 때문이다->유대인을 처단하자."라는 선동 구호를 접하게 되었고, 빈민가의 참상을 보고 난 뒤 이 구호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이게 히틀러 본인이 반유대주의 성향을 지니게 된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히틀러 회고록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이 부분도 신뢰성에 의심받고 있으며,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반유대주의적 언행을 시작한 것이 빈 미술 아카데미에 낙방하고 10여년이 지난 1차 세계대전 즈음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시기가 안 맞기에 신뢰성이 더더욱 떨어집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린츠는 반유대주의가 사실상 없었던 반면, 빈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던 시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10대 후반의 히틀러가 빈의 어두운 면을 접하고 지냈다는 것이 이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하기에도 힘들 듯합니다.
'거절당한 작품과 선택된 작품 > 당선작과 낙선작, 그리고 그 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의 1401년 <이삭의 희생> (0) | 2016.01.30 |
---|---|
1863년 살롱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하다 (0) | 2016.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