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당한 작품과 선택된 작품/당선작과 낙선작, 그리고 그 후

1863년 살롱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하다

아리에시아 2016. 1. 23. 11:58

이 카테고리에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만, 이때까지 쓴 글은 모두 주문제작한 작품만을 다루었었지요. 경연대회의 당선작과 낙선작을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경연대회 등에서 낙선한 작품이나 작가가 막상 당선작이나 당선작의 작가보다 후대에 더욱 좋은 평을 받거나 더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받은 사례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야기를 오늘 다루고자 합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1863년 살롱전입니다. 살롱은 근대 유럽에서 수백여년 동안 진행된 일종의 미술경연대회로, 한국의 대한민국미술대전 같은 미술 대회라고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만, 근대 유럽에서 살롱전의 위와 영향력은 현대 한국의 대한민국미술대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살롱에서 작품이 입상하지 못한 미술가는, 작품이 팔릴 가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그리고 살롱에서 선정된 작품은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전시회를 살롱전이라 합니다.

 

1863년은 아마 살롱전 역사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연도일 것입니다. 애초에 미술사에서 살롱전 연도를 언급하는 경우도 1863년 외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요. 역설적이게도 이 연도가 살롱전 역사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된 계기는, 당선작 때문이 아니라 심사에서 떨어뜨린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살롱에 출품되었던 해이며, 이 작품은 낙선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1863년 살롱에 출품했던 작품, <풀밭 위의 점심>입니다. 1863년에 그려진 그림 중에서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19세기 회화 중에서도 못해도 열 손 가락 안에는 꼽힐 만큼 유명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발표 당시에는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엄청난 혹평을 받았습니다. 살롱 심사위원들은 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그림이라는 식으로 평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살롱 낙선작을 따로 모아 전시한 장소에서, 이 작품은 유례 없는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들이 감탄해서가 아니라,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분노해서요. <풀밭 위의 점심>은 미술 평론가들에게도, 당시 미술 애호가 대중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명작을 왜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폄하하고, 이런 작품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경악하며 분노하기까지 했는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19세기 중반 시점에서는 이런 반응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는 했는데, 백수십년 전의 미술 풍조와 문화사 같은 것을 모르면 오늘날 관점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했던 1863년 살롱에서 1등으로 뽑힌 작품을 보면, 19세기 중반의 미술사나 문화사를 전혀 몰라도, <풀밭 위의 점심>이 왜 그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풀밭 위의 점심>과 여러 면에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 1등으로 선정되었으니까요.

 

1863년 살롱전에서 최고작품으로 선정된,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당시 미술계에서 어떤 화풍을 선호했는지, 특히 여성의 누드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는 것을 추구했는지가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지요. 여성의 누드는 여신 등 신화적인 존재를 그릴 때에 사용하며, 신화의 한 장면처럼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미술의 기교와 기술적 완성도를 극한까지 추구하지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비교하면, 그런 점이 훨씬 더 두드러집니다. 이런 그림을 원하는 곳에 <풀밭 위의 점심>을 내놓았다고 상상하면, 당시 사람들이 <풀밭 위의 점심>에 왜 그렇게 당혹해하며 경악된 반응을 보였는지, 당시 미술 유행 등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저절로 이해가 될 겁니다. 이런 그림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현대 의상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평범한 몸매의 누드 여인을 떡하니 그려넣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미술사 이야기를 할 때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형편없는 작품은 절대 아니지만, 시대를 선도하지도 못했고 시대를 대표할 만큼의 독보적인 가치는 없다는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언급되는 것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이야기를 할 때,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했던 그 해에 살롱에서 1등으로 선정됐다는 것을 뒷이야기처럼 알릴 때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비단 카바넬만이 아니라, 인상주의를 필두로 미술가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카바넬처럼 고전적인 그림을 그린 19세기 미술가는 오늘날 대중적으로 사실상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오늘날 수백 년 역사의 살롱 1등작 중에 '살롱 1등에 당선되었다'는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살롱 1등작이 오늘날 회자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살롱에서 1등을 했던 미술가들이 1863년의 카바넬처럼 모두 잊혀진 것은 아니며, 근대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가로 손꼽히는 위인도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살롱 1등 경력이 있는 역사적인 미술가는, 살롱 경력 이후 작품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살롱 1등작보다 훨씬 큰 족적을 남긴 대작을 그려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화가의 대표작을 논할 때에는 살롱 1등작은 자연스럽게 밀려나게 되고, 살롱 1등작은 작품 자체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작가에 대해 설명할 때 '살롱에서 1등 작품을 배출하면서 본격적인 인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식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미술사에서 살롱 1등작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만은 그 살롱입상경력이 작품이 언급될 때마다 꾸준히 등장하고 있으며, 역설적이게도 살롱 1등 경력이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 된 것입니다.

 

 

1863년의 살롱전이 <풀밭 위의 점심>을 낙선시켰을 때, 이 그림이 나중에 얼마나 유명해질지 예측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고, 이 그림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예측한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풀밭 위의 점심>은 미술 애호가 대중들 사이에서는 극심한 혹평을 받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미술계에서는 엄청난 변화의 단초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살롱 체제는 신화나 역사적 사건 등 진지하고 근엄한 주제를 엄정한 필치로 그려낸 작품을 극단적으로 선호했는데, <풀밭 위의 점심>이 이런 체제에 반감을 가진 예술가들을 결집시키는 촉매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한 논란이 계기가 되어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가 출범하게 되었고, 웅장한 신화나 역사 그림 대신에, 눈에 보이는 풍경과 색감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낸다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인상주의를 필두로, 고전적 주제를 고전적 화풍으로 그려낸 살롱식 그림 대신,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중시하는 미술의 시대가 열리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