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년,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이자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청동조각 경합이 개최됩니다. 피렌체 세례당을 건설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세례당 문의 장식을 맡을 예술가를 선정하려는 경합이었습니다. 이 경합에서 당시 20대 중반의 신인 예술가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477~1446)과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가 최종 후보 2인으로 뽑혔고, 이 두 작가가 주어진 주제로 청동조각을 만들면 그 조각품을 통해 최종 선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최종경합에서 주어진 주제는 "이삭의 희생"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이삭은 믿음과 신실함의 화신처럼 묘사되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의식을 통해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고, 아브라함은 신의 뜻을 따라야한다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준비를 합니다. 당시 의식에서는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을 칼로 찌르는 절차가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칼을 내리치려는 찰나, 천사가 나타나 제물 봉헌 의식을 중단시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고난을 부여한 것이었으며, 그 믿음이 입증되었으니, 아들을 제물로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주변에 양 한 마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준비한 제단에서, 그 양을 제물로 바치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됩니다. 1401년의 이 경합에서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 즉 아버지가 아들을 신의 명령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는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는 그 장면을 높이 53.3cm, 길이 43.2cm의 틀 안에 묘사하도록 했습니다.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는 각각 이삭의 희생을 주제로 한 청동부조를 완성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아브라함, 이삭, 천사, 양이 등장하며, 제단이 묘사되어 있고, 아브라함의 하인들을 전경에 조각했지요.
로렌초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입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입니다.
이 두 작품의 예술적 우열을 논하기는 힘듭니다. 두 작품의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르니까요. 기베르티는 우아한 구성미를 강조했다면, 브루넬레스키는 극적인 연출을 강조했습니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의 자세나 인체구조 등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지만, 기베르티의 작품에서 이삭과 아브라함의 자세가 좀 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은 보다 우아한 자세를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지, 기베르티가 인체 묘사에 서툴러서는 아닌 것이지요. 말을 탄 아브라함의 하인들의 인체 묘사는 자연스러우니까요.
피렌체 세례당 측에서는 이 둘 중 기베르티의 작품을 택했습니다. 기베르티 작품이 세례당 문의 조각에는 보다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브루넬레스키는 이 청동조각에서 기베르티에 비해 약 1.5배 많은 청동을 사용했기에, 제작비용이 엄청나게 차이나니 예산을 고려해서 기베르티의 작품을 택했다는 견해도 종종 제기됩니다만, 그것을 제외해도 종교시설에서 기베르티의 작품을 선호한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기는 합니다. 당장 보기에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인체구조의 자연스러운 묘사 등을 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장면구성 자체가 더욱 우아하고 아름답게 묘사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경합에서 당선된 기베르티는 이후 50여년에 걸쳐, 피렌체 세례당에 있는 세 개의 문 중 두 개의 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중 두 번째로 완성한 세례당 정문은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극찬하기도 했지요.
기베르티가 조각한 피렌체 세례당 정문, '천국의 문'입니다. 정사각형의 패널 10개와 테두리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천국의 문' 중 두번째 패널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다룬 조각입니다. 얕은 부조와 입체에 가까운 양감있는 부조를 사용하여, 부조에서 마치 3차원같은 효과를 냈으며, 조각의 기교와 구성 등도 높은 평을 받습니다.
1401년의 경합에서 최종낙선한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금속조각작품은 거의 만들지 않았습니다. 작품활동을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10대 시절 내내 연습한 금속조각 대신, 건축설계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르네상스 건축물 중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작품도 여럿 남겼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의 전경으로, 저 주황빛 돔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입니다. 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입니다.
1401년의 청동조각 경합에서 낙선한 것이, 브루넬레스키가 이후 금속조각을 사실상 그만둔 것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브루넬레스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브루넬레스키의 심정이나 당시 상황은 거의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1401년 세례당 경합에서 낙선한 것은 패배한 오점이라기보다 대형 시합의 결승전까지 진출했다는 경력에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예술가가 많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보티첼리도 원래 금세공사였다가 나중에 화가 활동을 했으며, 화가 활동과 조각가 활동을 병행하는 것은 흔하다 못해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준이었고, 미켈란젤로도 건축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금속공예를 배운 사람이 금속공예 이외에 다른 미술 분야에 천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특이한 일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지요.
브루넬레스키가 1401년 '이삭의 희생' 경합에서 낙선한 것이 이후 경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창작물 소재로는 그럴싸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전거는 전무합니다. 정황증거 등은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깝고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만약 브루넬레스키가 그 경합에서 당선되었다면, 세례당 문 조각 프로젝트가 중단되지 않는 이상 르네상스 건축의 향방은 실제 역사와 달라졌으리라는 것뿐이겠지요. 기베르티는 세례당의 문 세 개 중 두 개를 만드는 데 50여년의 세월을 들였는데, 브루넬레스키가 맡았다고 제작기간이 급격히 단축될 리는 만무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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